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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75주년 기획 ‘명장’은 대한민국을 구한 장군들의 ‘가장 빛나던 순간’을 조명합니다.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고 전황을 뒤집은 리더십의 성공 비결을 알아봅니다.




허버트 한이 그린 터너 조이 미 해군 제독의 초상화. 미 해군



“우리 내기할까요? 이 전쟁 언제 끝날지.”

“그래도 6주는 걸릴 것 같아요.”

“그렇게나 갈까요? 저는 2주에 걸겠습니다.”

한국전쟁 휴전협상이 시릴게임알라딘
작된 1951년 7월 10일. 역사적 이벤트를 취재하려는 서방 기자들이 파주 문산리 ‘평화촌’에 모였다. 개울 옆 과수원에 들어선 텐트촌이다. 기자들은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의견 교환 중 내기가 시작됐다. 전사가 존 톨랜드의 기록을 보면, 어떤 이들은 한두 주, 비관론자조차 6주 내 타결을 전망했다.
언론만 희망적으로 본 건예스코 주식
아니다. 소련의 공식 휴전협상 제의에 흔쾌히 응한 미국 정부도 공산주의자들과의 밀고 당기기 정도는 금방 끝낼 수 있을 거라고 봤다. 여름을 넘기지 않아 한반도에서 총성이 멎을 것 같았다. 평화의 기대감이 문산 일대에 감돌고 있었다.



6.25 전쟁 휴전협상을 취재하러 한국을HTS사용법
찾은 유엔군 측 기자들의 모습.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2주에 끝날 줄 알았던 협상
전쟁은 두 번째 여름을 맞아 교착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처음 열 달 전선은 남북으로 심하게 요동쳤다. 1950년 8월 낙동강(북한군 최대 남침선)까지 내려갔던 전선은 세 달 만에야마토릴게임
청천강(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선)으로 올라갔다. 1951년 1월 국군과 유엔군이 37도선(평택-삼척)까지 밀려났지만, 신임 8군사령관 매슈 리지웨이의 공세 작전 덕에 100일 만에 38선 근처까지 북상했다. 그 이후 공방전이 계속됐고, 전쟁은 몇 백 미터 전진을 위해 수천 명 사상자를 감수해야 하는 극심한 소모전으로 접어들었다.
1951년아몰레드수혜주
5월 미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의 의회 증언은 충격적이었다. 브래들리는 “1년간 한국에서 죽거나 다친 미군(비전투 사상자 포함)이 14만 명 이상”이라고 고백했다. 왜 우리 아들들이 저 먼 곳에서 피흘려야 하는가, 미국에선 반전 여론이 높아졌다. 미국보다 더 큰 인명피해를 본 중국과 북한도 병력 손실을 감내하기 어려워 보였다.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한국 대통령 이승만이 유일하게 휴전에 반대하고 있었다.
다들 평화가 필요했고, 모두들 평화가 금방 올 거라고 낙관했다. 그러나 우리가 정답을 알고 있다시피, 돈을 건 기자들 중 내기에 이긴 사람은 없었다. 공산군이 휴전에 곧 응할 것이라고 본 미국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결국 협상은 만 2년 하고도 17일(1953년 7월 27일 발효)을 끌었고, 양측은 이후로도 158회를 더 만나야 했다. 문산의 협상대표, 서울의 이승만, 도쿄의 리지웨이, 워싱턴의 해리 트루먼. 그 누구도 협상이 이렇게 길고 힘들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다.



개성 내봉장에서 휴식 중인 유엔군 측 협상대표단. 왼쪽부터 로렌스 크레이기 미 공군 소장, 백선엽 국군 소장, 터너 조이 미 해군 중장(수석대표), 헨리 호즈 미 육군 소장, 알레이 버크 미 해군 소장. 전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8권


협상을 앞두고 미국 정부는 아시아 공산주의 국가들을 얕봤다. 6년 전 일본을 철저히 굴복시켰던 것처럼, 이번에도 뜻대로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을 거라 봤다. 평소 교섭을 해본 적도 없는 야전군인들을 휴전협상 대표로 덜렁 보낸 걸 보면, 미국이 상황을 얼마나 쉽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미국은 그야말로 ‘군사 협상’을 위해 개성으로 갔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은 ‘정치 협상’을 준비 중이었다. 미국의 진짜 상대는 정치 천재이자 권모술수의 달인 마오쩌둥이었다. 스탈린으로부터 휴전협상 권한을 위임받은 마오는 협상 시작 전 이미 협상전문가인 외교부 부부장 리커눙,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인 미국통 푸산, 언론플레이에 능한 관영 신화통신의 딩밍을 협상단에 붙여줬다. 게다가 미국과 달리 정치 경험이 풍부한 군인을 협상 대표로 엄선했다.
미국이 첫인사에서 악수하기 위해 손을 내미는 사이, 공산군 측은 기습 펀치를 날리며 ‘탁자 위의 전쟁’을 시작했다. 미국은 지나치게 순진했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대가는 적의 얼굴을 마주보고 협상하면서, 동시에 적과 싸워야 하는 ‘2년간의 괴로운 질곡’이었다.

“남일은 소련제 담배를 피우려고 중국제 성냥을 그었지만 불이 붙지 않았다. 결국 미제 라이터를 꺼냈다. 담배 한 모금을 빤 후 아무래도 공산주의자답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창문 밖으로 미제 라이터를 던져버렸다.”
(존 톨랜드가 묘사한 정전협상 첫날)




개성 내봉장에서 휴전협상에 참여한 공산군 측 대표단. 왼쪽 부터 셰팡, 덩화, 남일, 이상조, 장평산.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8권



아시아 공산주의를 몰랐던 미국
당시 유엔군사령관으로 휴전협상단을 지휘한 리지웨이는 훗날 ‘우리의 순진함에서 비롯된 잘못’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리지웨이가 후회한 것은 협상 시작 전부터 공산군에게 불필요한 양보를 했다는 점. 6월 23일 유엔 주재 소련대사의 공식 휴전 제의를 받은 미국 정부는 리지웨이에게 협상 개시를 지시했고, 리지웨이는 6월 30일 공산군을 향해 “원산만에 정박한 덴마크 병원선에서 회담을 열자”고 제안했다. 바다라는 일종의 중립지대, 중립국 비전투선이란 점에서 리지웨이의 제안은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공산군(북한+중국) 측은 개성에서 열자고 응수했다. 전쟁 전 남한 땅이었던 개성은 역사적 가치(과거 왕도)와 전략적 중요성(서울-평양 통로)이 매우 높은 요충지였다. 유엔군이나 공산군 모두 개성을 포기할 수 없었다. 공산군은 개성에서 만나면 국제 여론을 중시하는 유엔군이 중립지대 개성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그 사이 개성을 요새로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미국은 이런 숨은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고, ‘호의를 먼저 보여준다’는 차원에서 덥석 개성 제안에 동의했다. 리지웨이는 내심 꺼렸지만, 워싱턴에서 ‘그 정도는 해 주라’는 지시가 내려왔기에 더 이상 덴마크 병원선 안을 고수하기 어려웠다.



1951년 11월 미군이 촬영한 초기 판문점의 모습. 아직 건물이 지어지지 않은 천막촌이다.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미국 정부가 개성 안을 수용한 결과, 유엔군은 가장 중요한 초반 협상에서 상대 페이스에 말렸다. 공산군은 개성에서 ‘홈그라운드’의 이점과 유리한 ‘무대 세팅’을 최대한 활용했다. 결국 유엔군은 그렇게 쉽게 내준 개성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되찾지 못했다. 지금 휴전선이 유독 서부전선에서 남쪽으로 많이 내려온 이유도 이 당시 개성을 제대로 공격하지 못했던 상황과 연결된다.
당시 미국은 먼저 호의를 보여주려고 ‘신사적’으로 접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사적 협상? 한국전쟁에서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중공군과 북한군 대표는 모욕, 무시, 욕설, 트집, 기만, 협박, 엄포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초반부터 미군과 국군 대표의 혼을 쏙 빼놓았다. 개성(초반 3개월)과 판문점(1951년 10월부터)에선, 다른 국제협상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중공군과 북한군 대표의 횡포와 멸시 앞에서 냉정함을 잃지 않고, 10개월간 협상을 이끈 사람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터너 조이 미 해군 제독(중장)이다. 조이는 1951년 7월 10일부터 이듬해 5월 22일까지 휴전회담 유엔군 수석대표였다.
평생 대양의 전장을 누비던 '바다 사나이’ 조이는 작은 테이블 위에서 열 달간 아시아 공산주의의 매운맛을 제대로 봤다. 복싱룰에 따라 싸우는 줄 알고 링에 올라갔더니, 상대가 발차기를 하고 벨트 아래를 때리는 것도 모자라 귀를 물어뜯은 격이다.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조이는 단기간에 ‘협상의 달인’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는 어떻게 협상하는가(How Communists Negotiate)’라는 명저를 남겼다. 아시아 공산주의의 특징과 공산주의자의 협상 패턴을 기술한 최초의 책이다.



터너 조이 이력. 송정근 기자



“미국인은 일을 빨리 해치우는 걸 선호한다. 시작한 일은 빨리 끝내야 한다고 평생 교육 받는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시간을 끌며 미국인의 그런 특성을 이용했다.”

(터너 조이의 회고)


무조건 시간을 끌어라
휴전회담 개최에 합의한 유엔군과 공산군은 각각 5명의 대표를 개성에 보냈다. 유엔군은 조이가 수석대표였고, 미 육군에서 헨리 호즈 소장, 미 해군에서 알레이 버크 소장, 미 공군에서 로렌스 크레이기 소장이 차출됐다. 백선엽 소장이 국군 대표였다. 공산군은 북한군 총참모장 남일을 수석대표로 세웠다. 대표 5명 중 3명(남일 이상조 장평산)이 북한군, 2명(셰팡 덩화)이 중공군이었다.
외형적으로는 미군과 북한군 장성이 각각 수석대표였지만, 유엔군은 미국이, 공산군은 중국이 철저하게 협상을 주도했다. 이미 병력과 장비를 외국군에 의지하고 있던 남북한은 협상에서도 미국과 중국의 뜻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원정지 개성에서 열린 회담이었지만, 당시 전황이나 전력을 감안하면 유엔군에 유리해 보이는 협상이었다. 1951년 7월 바다와 하늘에선 미 해공군이 압도적 우위를 잡았고, 땅에선 미8군과 국군이 1·4후퇴 충격을 극복한 뒤 38선 위쪽으로 천천히 밀고 올라가던(옹진반도와 임진강 하류 제외) 중이었다. 사상자 급증에 따른 미국 내 반대 여론만 아니라면, 유엔군 마음먹기에 따라 평양-원산선까지 밀어붙이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중공군과 북한군은 휴전협상을 적극 이용했다. 협상 시작부터 △38선의 군사분계선화 △한반도 외국군 철수 등 유엔군이 받을 수 없는 두 가지 주장(이 조건은 6·25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에 불과했)을 고장난 라디오처럼 반복했다. 대표들이 협상장에서 번 시간을 병력 충원과 보급에 활용하려는 일종의 화전양면 전술이었다.
권위주의 국가인 북한과 중국은 미국보다 지연전술을 펼치기 유리했다. 2년마다 민심의 심판(대선, 중간선거)을 받아야 하는 미국은 염전(厭戰)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지도자의 종신 집권이 사실상 보장된 공산국가처럼 마냥 시간을 끌 수 없었다. 그래서 시간은 공산군의 편이었다. 결과적으로 민주당 정부는 트루먼 임기 내에 협상을 마무리하지 못했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대선 후보로 내세운 공화당에게 정권을 내주고 만다.
이런 의도를 간파한 조이는 미국을 초조하게 만들려는 공산군의 심리전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했다. 공산군 대표가 현실성 없는 주장을 되풀이할 때마다 조이는 “전쟁터에서 잃은 것을 협상장에서 얻지 말라”며 쐐기를 박았다. 초반엔 공산군 측 페이스에 말렸던 조이는 이내 중심을 잡는 데 성공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우리는 ‘2+2=6’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는 타협하지 않는다”며 당시를 돌이켰다.



휴전협상 일지. 그래픽=김대훈 기자



“협상은 정말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차라리 전장에 돌아가 싸우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당시 유엔군사령관 매슈 리지웨이)


전쟁보다 치열했던 심리선전전
공산군은 개성에서 진짜 전쟁보다 더 치열한 협상전을 준비했다. 전장에서의 전력 열세를 회담에서 만회하고자 했다. 그들은 유엔군 대표의 이동 경로, 협상장 의자와 탁자 배치, 비치된 소품 하나하나에 다 의미를 부여해 치밀하게 설계했고 최대한 이용했다.
1951년 7월 10일 첫 회담이 개성 고려동 ‘내봉장’이라는 고급 요릿집 건물(99칸 한옥)에서 열렸다. 유엔군 대표들은 문산리에서 헬기를 타고 인삼관(유엔 측 전진기지)에 내린 뒤 내봉장까지 지프를 타고 이동했다. 유엔군 대표가 탄 지프는 비무장 의미로 백기를 달았는데, 공산군은 ‘유엔군의 백기’를 마치 미군이 항복하러 개성에 오는 것처럼 보도하도록 공산 측 기자들에게 지시했다.
탁자와 의자 배치에도 의도가 있었다. 동양에서는 제왕이나 승자만이 북쪽으로 등을 지고 남쪽을 향해 앉는다는 점을 의식해, 자신들 자리를 북쪽으로 잡았다. 아예 공산군 대표 의자와 유엔군 대표 의자를 다르게 설계하기도 했다. 회담 첫날 유엔군 수석대표 조이는 의자에 앉자마자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데, 알고 보니 의자 높이가 맞은편 카운터파트 남일의 의자보다 10㎝ 이상 낮았다. 북한 장성이 미군 장성을 아래로 깔보는 구도를 만들기 위해 교묘하게 의자로 장난을 친 거다. 조이는 훗날 이 장면을 떠올리며 “남일은 줄담배를 피우면서 나를 만족스럽게 쳐다봤고, 나는 어뢰를 얻어맞고 침몰한 제독의 신세였다”고 회상했다.
유엔군 대표에게 심리적 압박도 서슴지 않았다. 7월 15일엔 수석대표 조이가 탄 지프가 중간에 북한 무장병의 방해를 받아 유엔군 대표들이 회담장에 지각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8월 4일 회담 점심시간에는 휴식 중이던 유엔군 대표들 앞으로 완전무장한 중공군 1개 중대가 지나며 위협을 가하는 일도 있었다.
특히 북한 대표들은 웃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경직돼 있었다. 사소한 것에 자존심을 거는 것도 공산군의 특징이었다. 회담 첫날 유엔군 대표 한 명이 탁자에 작은 유엔 깃발을 올려 뒀는데, 남일은 그게 보기 싫다면서 깃발을 자꾸 손으로 밀어내다가 급기야 오후에 유엔기보다 훨씬 큰 인공기를 가져와 탁자 위에 설치해 버렸다.
무의미한 자존심 대결의 절정은 북한 대표 이상조의 ‘파리 사건’이었다. 회담 중 이상조 얼굴에 파리가 앉았는데, 그는 얼굴을 찡그리거나 파리를 쫓지 않고 파리 앉은 얼굴로 맞은편 백선엽을 계속 쏘아봤다. 파리가 오랜 시간 얼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꿈쩍하지 않았고, 결국 파리가 다른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미군 장성들은 이상조를 신기한 듯 바라봤다. 미군은 이상조에게 ‘파리가 얼굴에 앉아도 꼼짝 않는 친구’라는 긴 별명을 붙여줬다. 바로 앞에서 이 어이없는 장면을 목격한 백선엽은 “사람의 오감을 거역한 공산주의자들의 억지스러움”이라고 평가했다.



휴전협상장으로 들어오는 북한 대표 이상조 소장의 모습. 협상장에서 이상조는 말을 쉬지 않는 다변가였고, 인격모독을 일삼는 독설가였다.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유엔군은 진심으로, 아니 필사적으로 평화를 열망했다. 그러나 협상단이 마주한 것은 괴롭힘과 신랄한 모욕, 회담의 끝없는 중단이었다.”

(한국전 참전 역사가 시어도어 페렌바크)


유엔군 대표가 당했던 모욕과 수모
공산군 대표들은 유엔군 대표들의 평정심을 흔들기 위해 일부러 면전에서 수모를 안겼다. 유일한 국군 대표 백선엽은 미군이 알아볼 수 없는 ‘한국어 메모’를 통해 모욕을 당했다. 8월 10일 양측 사이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은 채로 긴 눈싸움(나중에 재보니 2시간 10분)만 이어지던 중, 북한의 이상조가 백지에 빨간 색연필로 적은 글자를 백선엽에게 슬며시 보여줬다. 종이에는 ‘제국주의자의 주구는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나중에 이상조는 북한 권력투쟁에 휘말려 소련으로 망명했는데, 1989년 한국을 방문해 백선엽과 38년 만에 만났다. 백선엽이 “당신 그때 왜 그랬느냐”고 물었지만, 이상조는 한사코 “내가 그랬을 리 없다”며 시치미를 뗐다고 한다.
미군 장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1951년 11월 하워드 터너 소장이 크레이기 소장을 대신해 대표로 선임되자, 중공군 대표 셰팡은 첫 만남에서 공산군 연락장교와 대화하며 중국어로 “이 친구 이거 완전 바보”라며 면전에서 비하 발언을 했다. 또 다른 단골 비하 대상은 이승만이었다. 북한군 대표들은 한국 정부를 언급할 때 “살인자 이승만”이라는 말로 대화를 열었다.
공산 측 수석대표 남일이 담배 때문에 협상 파트너 조이에게 신경질을 부렸던 일화도 있다. 이건 백선엽의 목격담이다. 남일은 회담 도중 김일성에게 받은 상아 파이프로 줄담배를 피웠는데, 조이가 “미국에선 담배 품질이 좋아 굳이 파이프를 쓸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남일이 “미국 담배 한 번 줘 보라”고 말했고, 조이는 호의에서 남일에게 담배를 넘겨줬다. 그러나 남일은 미제 담배를 뚝 부러뜨려 파이프에 넣고 피더니 “당신 나라 미국을 태우고 있는 중”이라고 공격하며, 조이가 혀를 차게 만들었다.
남일의 미제 담배 에피소드는 바로 그날 남일이 일기에 남긴 소감을 함께 보면 더 흥미롭다. 남일은 ‘나도 몰래 줄지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멀리 (김일성이 있는) 평양 하늘을 우러르니 밤하늘에 비낀 은하수가 유난히도 빛나고 있었다’고 적었다. 나중에 이를 확인한 백선엽은 “공산주의자의 상태가 대개 그렇듯, 정상적인 말이 통하지 않았다”고 일갈했다. 아부에 소질이 있던 남일은 전쟁 직후 숙청 당한 박헌영에 이어 북한 외무상으로 발탁됐다.

“진심으로 휴전을 원하는 쪽은 유엔군이 아니라 공산군이었다.”

(터너 조이)




유엔군 측 연락장교 제임스 머레이(왼쪽) 미 해병 대령과 공산군 연락장교 장춘산 북한 대령이 지도에 경계선을 긋고 있다. 월터 허미스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증거 날조, 팩트 왜곡의 달인
휴전회담이 한 달 지나자, 공산군은 유엔군의 인내심을 시험할 목적으로 도발을 시작했다. 1951년 8월 22일 밤 유엔군 측 수석연락장교 앤드루 키니 대령(미 공군)이 공산군 연락장교의 긴급호출을 받았다. “당신네 공군이 개성 휴전회담 장소를 무단으로 폭격했으니, 지금 당장 와서 확인하라”는 연락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그 밤, 키니는 연락장교들을 이끌고 즉시 개성으로 이동해 공산군이 ‘폭격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장소를 살폈다.
애초 키니는 유엔군의 오폭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파편을 살펴본 뒤 ‘공산군의 날조’라고 확신했다. 조종사이자 비행학교 교관 출신인 키니는 폭격의 파편과 흔적에 매우 익숙했는데, 공산군 측이 증거라며 보여준 쇳조각은 아무리 봐도 폭발 파편이 아니라 비행기 부속품이었다. 키니가 “폭격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자, 공산군 연락장교(대령)가 분노하면서 “이 시각 이후 모든 휴전협상을 중단한다”고 선언해 버렸다.
회담 대표도 아닌 일개 영관급 장교에게 어렵게 성사된 휴전협상을 중단할 권한이 있을 리 없었다. 조이는 “이미 ‘폭격’이 있기 전부터 평양(김일성), 베이징(마오쩌둥), 모스크바(스탈린)와 다 얘기가 되어 있던 것”이라고 결론 냈다. 공산군 측은 날조를 인정할 생각이 없었고, 유엔군 측도 조작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회담할 생각은 없었다. 이 일로 인해 휴전협상은 10월 25일까지 두 달 간 중단됐다.
팩트의 날조와 왜곡은 포로 문제에서 심각했다. 포로 교환을 하려면 양측이 서로 붙잡고 있는 포로 수를 상대에게 정확하게 알리는 일이 필수적이다. 유엔군 측은 △북한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선전한 포로의 규모가 6만 5,000명인 점 △국군과 유엔군이 파악한 실종자가 10만 명에 달했던 점을 감안해, 북·중군이 6만 명에서 10만 명의 포로를 잡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공산군 대표가 회담에서 고지한 유엔군 포로는 겨우 1만1,599명이었다. 숫자를 믿을 수 없었던 유엔군 대표가 “최소 5만 명 더 있다”고 지적하자, 북한 대표 이상조는 “우리는 포로를 잡으면 수용소로 보내지 않고 바로 풀어주는 경우가 많아” 오차가 있을 수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유엔군 통계에 따르면 공산군이 전투 현장에서 풀어준 포로는 그때까지 겨우 177명에 불과했다.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매우 미미한 사례로써 300배 이상 오차를 덮으려고 했던 것이다. 포로 규모의 차이는 단순한 숫자 문제가 아니었다. 차이가 나는 수만 명은 공산군에 포로로 잡힌 뒤 죽었거나 인민군으로 강제 전향 당했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시작부터 쉽지 않았던 포로 문제는 휴전회담에서 가장 치열하게, 가장 긴 시간 동안 논의된(1951년 12월 11일~1953년 6월 8일) 주제였다.



거제 포로수용소가 공산군 포로에게 압수한 물품. 소총, 탄약, 흉기, 죽창 등의 무기가 보인다. 월터 허미스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공산주의자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상대 틈을 노리고, 허점을 잡았다 생각하면 바로 그곳을 치고 들어오는 집요한 심리전의 명수들이었다.”
(백선엽)


공산군은 청어를 구웠다
공산군 휴전협상 대표들은 특정 주제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문제에서 고집을 부리며 말썽을 일으키는 성동격서 전술을 즐겨 썼다. 조이는 ‘공산주의자는 어떻게 협상하는가’에서 한 장(章)을 따로 할애해 공산군의 이런 기만술을 자세히 설명했다. 조이는 공산군의 이 전술을 ‘청어구이(red herring)’라고 소개했는데, 중요한 것으로부터 관심을 돌려 상대를 헷갈리게 만드는 수법을 뜻한다. 사냥개 뒤에서 청어 굽는 냄새를 풍기면 사냥개가 토끼를 쫓지 못하고 갈 길을 헤맨다는 것에서 나온 표현이다.
청어구이 수법의 대표적 사례가 소련을 중립국감독위원회(중감위) 일원으로 넣으려고 했던 시도였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정전 체제를 객관적으로 감시하기 위한 중감위 설치에 합의하고, 양측이 각각 3개 중립국을 추천하기로 했다. 유엔군은 스웨덴 스위스 노르웨이를, 공산군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소련을 찍었다.



휴전협상 주요 의제 및 논의 기간. 그래픽=송정근 기자


조이는 이 제안을 듣고 기함했다. 한반도에 조종사, 군사고문단, 무기를 보내며 적극적으로 참전하던 소련을 어떻게 ‘중립국’으로 인정할 수 있나. 그러나 공산군은 “소련은 위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인데, 왜 당신들은 중립국으로 인정하지 못하느냐”며 떼를 썼고, 오랜 밀당 끝에 결국 양측에서 노르웨이와 소련을 동시 철회하는 것으로 합의에 이르렀다.
그러나 누가 봐도 말이 안 됐던 ‘소련 중립국 추천안’은 사실 공산군이 다른 문제에서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일부러 설치한 협상의 암초였다. 당시 공산군이 중감위 추천으로 이목을 끈 뒤 진짜 관철하고자 했던 안은 ‘정전 후 비행장 설치’ 문제였다. 공군력이 압도 당해 모든 비행장이 파괴된 공산군 입장에선, 정전 후 전력 증강을 위해 비행장 설치가 무엇보다 절실했다.
판문점(휴전회담)에서 성과를 얻기 위해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것도 공산군의 성동격서 수법 중 하나였다. 공산군 측은 정예 공작원을 일부러 포로로 잡히도록 했다. 지령을 받고 수용소에 들어간 공작원들은 수용소 안에서 세력을 형성했고, 반공포로들을 감시하거나 유엔군을 상대로 조직적 저항을 일삼았다.
급기야 1952년 5월 7일 불만을 들으려고 공산군 포로들을 만나던 수용소장(프랜시스 도드 미군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 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터졌다. 도드는 포로들의 강요에 따라 ‘수용소 내부 유혈 사태는 유엔군 책임’이란 점을 인정하고 78시간 만에 석방됐는데, 공산군은 도드의 발언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휴전회담에서 협상력을 높였다. 이 무렵 공산군은 국제사회에서 ‘유엔군이 세균전을 진행한다’고 폭로하며 미국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물론 세균전을 입증할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1952년 5월 10일 판문점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터너 조이 유엔군 측 협상 수석대표. 미 해군



“전쟁을 피하고자 한다면, 전쟁 위험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터너 조이가 공산군과의 협상 끝에 내린 결론)


‘굿 캅’은 ‘배드 캅’보다 어렵다
생전 듣지 못한 험악한 말에 휘둘리고, 욕설과 협박에 상처 입으며, 논리 없는 떼쓰기에 노심초사하던 유엔군 대표들은 시행착오 끝에 한 가지 깨달음에 도달했다. 공산군 대표를 판문점에서 논리로 탄복시킬 게 아니라, 협상장 밖 전장에서 힘으로 눌러버리는 것이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는 효과적인 방안이란 점을 말이다. 전쟁 중 세 치 혀로 사람을 설복시키는 것은 제갈공명이나 가능한 일이었고, 현실에선 힘이 있어야 내 의지를 남에게 관철시킬 수 있다.
공산군 측이 비뚤어지고 협상장을 박차고 나갈 때마다, 8군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1951년 4월~1953년 2월 재임)는 맹렬한 공세를 퍼부으며 중공군과 북한군을 응징했다. 그러면 공산군 대표는 마지못해 판문점으로 돌아왔다. 유엔군이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아야 공산군이 협상에 제대로 임한다는 점에, 전투 책임자(밴플리트)와 협상 책임자(조이) 모두 동의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굳이 조이가 판문점에서 협상할 필요 없이 밴플리트에게 전권을 주어 그대로 밀고 올라가면 그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6·25는 한국 입장에선 모든 국력을 건 총력전이었으나, 칼자루를 쥔 미국 입장에선 적의 무조건 항복이 아니라 특정한 정치적 목표(한반도 안정)를 위해 무력 사용을 어느 선까지만 허용하도록 한 제한전이었다. 한국 입장에선 분한 일이지만, 미국에겐 나라의 존망이 걸린 전쟁은 아니었다. ‘국익’ 내지는 ‘명분’ 정도가 걸린 ‘경찰활동’(트루먼이 내린 정의)이었다. 그래서 이 전쟁은 항복문서가 아니라 휴전협정에 의해 마무리돼야 했다. 야전총사령관이 아니라 협상대표의 손에서 끝나야 할 전쟁이었다.
그래서 밴플리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공산군을 혼내 조이 앞으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론 밴플리트와 조이가 공산군을 휴전협정에 서명하도록 ‘굿캅 배드캅’ 역할극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써야 하는 굿캅 배드캅 작전에선 범죄자의 마음을 얻고 자백을 이끌어 내는 착한 경찰관의 역할이 훨씬 더 어렵고 중요하다. 그 고된 일을 전담한 사람이 조이였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왼쪽에 앉은 사람) 중장과 공산군 수석대표 남일(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한국전쟁 휴전 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이 역사적 이벤트에서, 두 사람은 각자 판문점으로 와 협정문에 사인만 했을 뿐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위키미디어 커먼즈(미 해군)


다만 나중에 조이가 남긴 기록을 확인하면, 그는 공산군 대표들의 갖은 행패 앞에서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속으론 유엔군의 강력한 공세를 가장 원하고 있던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공산주의자는 어떻게 협상하는가’의 마지막 장에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 “공산주의자들과 협상하면서 우리가 무력을 포기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선 안 된다. 그들이 진지하게 협상에 임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군사력을 통해 즉각적 위협을 할 때만 가능하다.”
전체 휴전협상 24개월(1951년 7월~1953년 7월) 중 조이가 수석대표였던 기간은 10개월이었지만, 조이가 협상을 이끌던 시기에 사건사고가 집중됐고 협상의 부침도 심했다. 그 돌발상황 속에서 조이는 공산군의 양대 요구(38선의 분계선화, 외국군 철수)를 무산시켰고, 상당한 양보까지 이끌어 냈다. 조이는 “1953년 7월 최종 조인된 휴전협정 문서는 포로 교환 부분만 제외하면 1952년 4월 내가 제안한 내용과 거의 동일했다”고 말했다.
톨랜드도 “조이는 휴전회담 도중 판문점을 떠났지만 포로송환을 제외하고 모든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다”며 “워싱턴의 기대보다 많은 것을 얻었고, 중요한 목표에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조이의 마음고생을 직접 지켜본 리지웨이는 “자유세계의 그 누구도 조이 제독보다 공산주의자의 협상전략을 더 잘 이해하지 못한다”며 “이런 분석은 10개월의 힘든 대결의 결과 나온 것”이라고 칭찬했다.
판문점 협상은 조이의 38년 군생활에서 사실상 마지막 임무였다. 1952년 한국을 떠난 조이는 2년간 미 해군사관학교장으로 일하고 전역했다. 그러나 2년 후 백혈병을 이기지 못하고 1954년 향년 61세로 사망했다. 6·25에 참전한 미군 주요 전투지휘관들이 대부분 장수(리지웨이 98세, 클라크 87세, 밴플리트 100세, 테일러 85세)했던 것과 비교하면, 마음고생이 심했던 조이가 혈액암으로 사망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베트남전에서 활약한 미 해군 구축함 터너 조이호(1959~1982년)가 사후에 그의 이름을 땄다.



6.25 휴전 직전에 급증한 사상자. 그래픽=송정근 기자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
<터너 조이의 회고>

-Turner Joy ‘How Communists Negotiate’

-Turner Joy 'Negotiating While Fighting’

<정전협상 과정>

-김보영 ‘전쟁과 휴전’

-김학재 ‘한국전쟁 정전협정의 의미와 특징: 정전협정, 평화협정, 지역 평화프로세스와의 비교’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⑨, ⑩’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국전쟁 휴전사’

-Walter Hermes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정전협상 주요 일화>

-백선엽 ‘군과 나’

-백선엽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2’

-이기환 ‘판문점에선 블랙코미디 설전, 전선에서는 건곤일척의 열전’

-존 톨랜드 ‘6.25전쟁 2’

-매슈 리지웨이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척 다운스 ‘북한의 협상전략’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